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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읍성의 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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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성의 시설물

읍성의 시설물
명칭 내용
대구읍성 대구읍성의 축성 과정을 기록한 영영축성비(嶺營築城碑)에 의하면 읍성의 둘레는 총 2,124보(步), 성 위에서 몸을 숨기고 적에게 활이나 총을 쏠 수 있게 한 담인 여첩(女堞)이 819첩, 성 높이는 서남이 18척(尺), 남북이 17척, 뒤축대의 넓이가 7보, 높이가 3급(級)이라고 되어 있다. 공사기간은 약 6개월이며, 동원된 인원은 78,534명, 성이 완성된 뒤에는 여러 장사들을 모아 활쏘기 대회를 열었고, 영남제일관 앞에서 큰 연회를 열어 각기 공로에 따라 시상하였다고 한다.
영남제일관
(嶺南第一關)
영남제일관

대구읍성의 남문이자 정문인 영남제일관. 서까래와 단청까지 구별할 수 있는 사진으로 하부의 홍예문, 상부의 누각을 감싼 벽돌 부분을 확인할 수 있다. 2층 누각에는 ‘낙서루(洛瑞樓)’ 현판이 걸려 있다. 대구읍성 철거와 함께 해체되었다가 1980년 망우공원에 복원되었다.

*대구광역시 중구 종로 17(남성로 92)

진동문
(鎭東門)
대구읍성의 동문인 진동문. 진동문이라는 이름은 인근에 경상감영 군부대가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대구광역시 중구 경상감영길 155(동성로 1가 16)
공북문
(拱北門)
대구읍성의 북문인 공북문. 북쪽은 임금이 있는 한양을 가리키는 것으로 ‘임금을 공경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대구광역시 중구 북성로 86-1(북성로1가 39-2)
달서문
(達西門)
대구읍성의 서문인 달서문. 정면 가로 3칸, 측면 2칸,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었으며, 용마루에 장식을 올리고 ‘달서문’ 현판을 달았다. 달서문 바깥 주변은 상권이 크게 발달되어 있었으며, 현재의 서문시장으로 이어졌다. *대구광역시 중구 경상감영길 1(서성로1가 109-1)
동소문
(東小門)
소문(小門) 또는 암문(暗門)은 비상시에 사용하는 문으로 가까이 다가가기 전에는 문이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하게 만들어졌다. 일상에서 백성들은 출입이 까다롭고 엄격한 4대문 대신 소문을 주로 이용하였고, 상여가 나가는 문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전시 상황이 되면 군수물자를 조달하거나 비밀리에 군사를 이동시키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서소문
(西小門)
선은루
(宣恩樓)
망루란 방어·감시·조망(眺望)을 위하여 잘 보이도록 높은 장소에 또는 건물을 높게 하고 사방에 벽을 설치하지 않은 건물을 말하며, 전시에는 장군의 군사 지휘소란 의미에서 장대라고도 불렸다. 1870년 대구읍성을 중수하면서 읍성의 네 모퉁이에는 누각을 세우고 각각 정해루(동장대), 주승루(서장대), 선은루(남장대), 망경루(북장대)의 이름을 붙여 경계기능을 담당하였다. 이중 망경루는 ‘북쪽 임금을 경외하며 바라본다’는 뜻이다. 대구읍성이 철거되면서 망경루를 달성공원으로 옮겼으나, 1969년 달성공원 정화사업 시 복원하는 것을 전제로 해체하였고, 설계도면과 자재들의 분실로 아직까지 복원치 못하고 있다.
정해루
(定海樓)
망경루
(望京樓)
주승루
(籌勝樓)

4대문 터 표지석

읍성에는 영남제일문과 달서문, 공북문, 진동문의 4대문이 있었으며, 암문인 동소문과 서소문이 있었다. 또한 네 모퉁이에는 동장대(정해루), 서장대(주승루), 남장대(선은루), 북장대(망경루)등 장대가 있어 경계기능을 담당하였다고 하며, 4대문 중 유일하게 영남제일문이 동구에 있는 망우공원에 복원되어 있으며, 감영의 정문이었던 관풍루가 달성토성 안으로 옮겨져 있다.

 

읍성의 주변

읍성의 주변
명칭 내용 상세페이지
계산성당 계산성당은 1902년 읍성 남서쪽 바깥에 건축되었으며, 본당 남쪽에 사제관이 있었다. 그리고 사제관 남쪽에는 성당에서 운영하는 효성초등학교(1908년 설립)가 있었다. 계산성당의 왼쪽으로 남성정교회(제일교회)가 보인다. 성당 일대는 조선인들의 주 거주지였으며 낮은 지붕을 엮은 민가의 모습도 확인할 수 있다. 홈페이지 바로가기
제일교회
(남성정교회)
대구 경북 최초의 기독교 교회는 ‘남성정(南城町)교회’로, 1893년 베어드 선교사(William M.Baird, 배위량)의 설교 이후 대구 내 기독교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으며 1896년 제일교회의 구관이 있는 땅을 매입해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남성정교회는 이름 그대로 ‘남쪽 성(城)에 있는 교회’를 뜻하며 1933년 구 예배당 건물(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30호)을 완공하면서 ‘제일교회’로 명칭을 바꾸었다. 1907년 전통과 서양 건축 양식을 절충해 단층 교회당을 새로 지었으며 1908년 함석지붕으로 된 140평의 두 번째 교회가 건축되었다. 홈페이지 바로가기
홍살문
(紅─門)
능(陵)·원(園)·묘(廟)·궁전(宮殿) 또는 관아(官衙) 따위의 정면 앞에 세우던 붉은 물감을 칠한 나무 문을 홍살문이라고 부른다. 홍전문(紅箭門) 또는 홍문(紅門)이라고도 하며, 둥근 기둥 두 개를 세우고 위에는 지붕이 없이 화살모양의 나무를 나란히 세워 놓았고, 그 중간에는 태극 문양이 그려져 있다. 경상감영은 외삼문과 내삼문의 2문으로 진입공간이 구성되는데, 감영 앞에 있던 홍살문까지 합쳐 홍살문-외삼문-내삼문의 3문 구성으로 이해되는 경우도 있다. 조선시대 감영의 진입은 보통 3문으로 구성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객사
(客舍)
지방 군현(郡縣)에 마련된 국왕의 위패를 모시기 위한 정당(正堂)과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가 숙박하는 건물을 합친 시설을 말하며 ‘달성관(達城館)’이라고도 불렸다. 관찰사는 초하루와 보름, 중요한 일이 있을 때 달을 보면서 임금이 계신 대궐을 향해 절을 올리는 한편, 사신의 숙소로도 사용하였다.  
진영 감영내 중군이 경찰과 군사업무의 핵심이었다. 방위군 성격의 군대가 읍성의 동쪽과 남쪽에 주둔했는데 동쪽 부대인 진영은 현재의 한일극장과 교보문고 일대를 차지하고 있었다. 진영에는 병사 400명 정도가 주둔했는데 지역 방위와 함께 각종 형별집행의 역할도 했다.  
자료 담당자 :
도시경관과
김성문
053-661-2813
최근수정일 : 2017.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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