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sit중구

  1. Home
  2. Visit중구
  3. 대구읍성
  4. 대구읍성은?

대구읍성은?

글자크기 인쇄하기

“우리는 그처럼 화려한 행렬을 이루며 도시의 내부를 오랫동안 둘러보았다. 나에게 성벽 위에서 한 번에 조망할 기회를 주기 위해 행렬이 성의 순시로를 돌았는데, 그 길은 베이징 성에 있는 것의 축소판과도 같은 인상을 주었다. 도시 전체를 둘러싸고 평행사변형으로 성벽이 이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 각 벽면의 중앙에는 똑같은 규모의 요새화한 성문이 위용을 드러내고 있었으며, 그 위로 우아한 누각이 세워져 있었다. 누각의 내부는 과거의 사건들을 환기하는 글귀와 그림들로 장식되어 있었다. 거기서 나는 가을의 황금빛 들판을 구불구불 흘러가는 금호강의 아름다운 모습을 바라볼 수 있었다.”

- 19세기 말 프랑스 지리(민속)학자 샤를 바라가 남긴 대구읍성 풍경 「샤를바라 외, 조선기행, 눈빛, 2006, 166쪽」

대구읍성은 왜구의 침략에 대비, 축성되다.

체험관 전경사진

대구읍성은 왜구의 침략에 대비해 영천, 청도, 성주, 진주, 동래, 안동, 상주성과 같이 만들어졌다. 원래는 토성으로 축조 (1591년,선조 24)되었으나 1년 뒤, 임진왜란으로 파괴되었으며, 왜란 후 여러 가지 사정으로 축조되지 못하다가 1736년(영조 12) 당시 경상도 관찰사 겸 대구 도호부사였던 민응수에 의해 성이 축조되었다.

6개월여의 공사에 8만여명이 참여하다.
'대구 읍성은 1736년 1월 8일에 공사를 시작하여 6월 6일에 여첩을 완성했다.'라고 기록되어 공사 기간은 6개월이었으며, 연 인원만 78,584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완공된 성은 둘레 길이가 2천 1백 24보(2,650m), 여첩이 8백 19개, 성 높이가 서남쪽 18척, 동쪽 17척에 이르렀다. 완공된 성에는 4개의 큰문과 2개의 작은 암문을 건설했으며, 네 모퉁이에는 동장대를 비롯한 4개의 장대(망루)가 있었다.
1907년 성(城)은 허물어지고
그 후 친일파인 당시 경상도 관찰사 서리로 있던 박중양은 일본 거류민단의 철거 건의를 받아들여 조정의 승낙도 없이 헐어버렸으며, 당시의 성벽돌은 사방으로 흩어져 옹벽, 축대, 주택기초석, 계단, 정원석 등에 두루 사용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읍성돌 활용 모습

※ 대구읍성에 관해 보다 상세한 내용을 보시려면 대구은행 향토와 문화 홈페이지 47호 대구읍성(2008.6.30) 바로가기 을 참조하세요.

open_출처표시_공공누리
자료 담당자 :
도시경관과
김성문
053-661-2813
최근수정일 : 2016.11.28  

현재페이지의 내용과 사용편의성에 만족하십니까?

사용편의성 만족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