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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동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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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동

이 지역은 대구부 서상면(西上面)에 속했는데 그 위치가 남산 밑이 되므로 남산이라 하였다. 1914년에 남산정(南山町)이 되었고 1946년에 남산동으로 고쳤다.
8.1 5 해방전 남산동(南山洞)에는 달성 서씨들의 소유인 논, 밭이 대부분이고 현재 동사무소 우측에 시립 화장장과 그 주변에 공동묘지가 있었다.

 

해방 후 남산4동사무소 동편에 원각사라는 절이 건립되어 있었고, 원각사 주변에 토기와 기와굴이 여섯군데나 설치되어 있어서 시내 목조와가 건축에 큰 몫을 담당하였다 한다. 또 유기 가내공업도 이곳을 중심으로 성행했다 한다.

 

1. 4후퇴시 이북 피난민 250세대가 이곳에 머물렀는데 지붕은 천막으로 덮고, 둘레 벽은 나무를 세웠으며 시에서 가마니 500장으로 비바람을 막고, 구호양곡을 받아 겨우 생활을 유지하다가 불행하게도 화재를 당하여 구 영남중고등학교(현 보성황실타운) 교실에 집단 수용되기도 하였다.

남성동

남성동(南城洞)은 1650年경부터 대구의 명물인 약령시와 더불어 행정구역은 8.1 5 광복 이전까지 대구부이었다.
남성동(南城洞)은 대구의 중심 교통로인 서신로 서성로 대서로 달성로 등의 간선도로를 끼고 한의원, 한약방, 한약상, 음식점, 포목점 등이 늘어서 있으며 염매시장과 동아쇼핑으로 연결된 상가를 형성하여 대구시 전체의 경제발전의 모체가 되기도 했었다.

 

1915년을 전후하여 조선의 국권회복을 위하여 우리 나라 국권회복단 독립군 등의 독립 지도자들이 비밀리에 약령시를 중심으로 한 남성동(南城洞) 일대를 본거지의 연락처로 삼아 활약하여 기미년 3.1 독립운동까지 이어졌다고 하고 그 결과가 바로 기미년 3.1운동까지 이어졌다니 역사적 의미는 크다아니할 수 없다.

 

약령시로 널리 알려진 이 골목은 깊은 유서와 넓은 애착을 지닌 대구의 명물골목이다. 염매시장은 말할 것도 없고 구 대남한약방 네거리에 영남제일관(嶺南第一關)이 서 있던 자리가 있을 뿐 아니라 제일교회, 희도국민학교가 한때 이 거리를 장식하기도 했다. 더구나 남성로와 매일신문사 중간에 놓여 있는 샛길은 조선조 때 서울과 평양을 잇는 국도로 출세를 꿈꾸는 젊은 사람들에게 애환과 희비를 안겨준 유서 깊은 역사를 담고 있다. 이 길의 연장흔적은 동으로 일신학원 옆까지 지금도 남아있고 서(西)로는 섬유회관부근까지 엿볼 수 있다.

남일동
대구부 동상면의 지역으로서 대구부성 남쪽 안이 되므로 남성안, 또는 남성내이라 하였는데 1914년에 전동, 사일동, 사이동의 각 일부를 합하여 남정이라 하다가 1946년대 남일동으로 고쳤다.
자료 담당자 :
행정지원과박혜영053-661-2228
최근수정일 : 2018.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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